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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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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사 1세는 기원전 8세기 우라르투 왕국의 왕으로, 아버지 사르두리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즉위 초기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아시리아에 영토를 빼앗기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이후 북쪽의 자카프카스를 정복하고 루사히닐리를 건설하는 등 재건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르곤 2세의 침략으로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무사시르가 약탈당하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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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스 1세
기본 정보
칭호우라르투 왕
통치 기간기원전 735년–기원전 714년
전임자사르두리 2세
후임자아르기슈티 2세
개인 정보
자녀멜라르투아, 아르기슈티 2세
아버지사르두리 2세
어머니수사라투
사망기원전 714년
기타

2. 즉위 전 배경

루사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아버지 사르두리 2세아시리아의 약화를 틈타 왕국을 확장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사르두리 2세의 왕위 계승은 명확하지 않으며, 사르두리 3세의 존재 가능성도 제기된다.[4][5] 루사 1세는 즉위 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이끄는 아시리아와 계속 전쟁을 벌였다. 아시리아 자료에 따르면 루사 1세는 한때 아시리아 군대를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에티니의 땅'과의 전쟁에서는 패배를 거듭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2. 1. 사르두리 2세의 확장 정책

기원전 8~7세기 유리와 상감세공이 된 납 재질의 조각상. 터키 동부 토프라칼레, 우라르투 왕국 출토. 대영 박물관


루사 1세의 아버지인 사르두리 2세는 왕국을 아나톨리아 남동부로 확장했으며, 아시리아 제국이 잠시 약해진 틈을 타 아나톨리아의 여러 영토를 아시리아로부터 되찾는 데 성공했다.

2. 2. 왕위 계승 문제



루사 1세의 아버지인 사르두리 2세아시리아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아나톨리아의 여러 영토를 되찾았다. 사르두리 2세의 왕위 계승은 명확하지 않다. 사르두리 3세라는 왕의 존재도 증명되었으므로,[4] 루사는 그의 아들일 수도 있다.[5]

루사 1세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아시리아는 계속 군사 작전을 펼쳤다.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기원전 745–727년)는 제국을 확장하려 했고, 우라르투를 반복적으로 침공했다. 루사 1세는 즉위 초기에 아시리아 군대와 싸워야 했다.

아시리아 자료에 따르면, 루사는 아시리아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는 기원전 734년에서 727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떤 ''아슈르-레'이''의 자료(SAA 19, 72)는 루사의 추가적인 군사 활동에 대해 보고한다. 우라르투 왕과 '에티니의 땅' 통치자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우라르투는 몇 차례 패배했다.

에티니 산은 동부 쿠르디스탄에 있으며, '아루니와 에티니의 땅'은 살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언급되어 있다.[6]

이러한 갈등은 우라르투의 경제에 큰 피해를 입혔다. 잇따른 패배로 우라르투는 사르두리 2세 시대에 합병했던 영토를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잃었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3. 아시리아와의 갈등

루사 1세는 아버지 사르두리 2세아시리아에게 패배하여 왕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증조부 이슈푸이니가 할디 신을 우라르투의 주신으로 삼은 이래 처음으로 "할디 신의 무기"가 "아슈르 신의 무기"에 패배하면서 백성들의 마음마저 흔들렸다. 유프라테스강 서쪽 영토는 잃었고, 속국들은 아시리아 편에 서거나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루사 1세는 무력 대신, 직접 영토를 순회하며 우라르투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는 비문에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와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되찾았다"라고 기록하며 자신의 노력을 강조했다. 또한, 무사시르를 중심으로 한 할디 신앙을 중시하여 왕권 강화에 활용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내부 문제로 우라르투 공격을 늦춘 것은 루사 1세에게 행운이었다. 기원전 727년 왕위를 계승한 살만에세르 5세 역시 페니키아이스라엘 정벌에 집중했기에, 루사 1세는 북쪽의 트란스코카서스를 정복하고 아시리아와의 국경 지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수도 투쉬파 근처에 루사히닐리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북쪽 세반 호수 주변에 두 개의 요새를 세웠다. 또한, 투쉬파와 루사히닐리의 식수 및 관개 용수 확보를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지하 수도관을 설치했다. 이 업적은 반 근처에서 발견된 케시슈 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터키 토프라크칼레에 있는 루사히니리 유적


하지만 기원전 722년, 호전적인 사르곤 2세가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사르곤 2세는 두르 샤루킨이라는 새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곳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를 통해 아시리아가 우라르투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수집했음을 알 수 있다. 사르곤 2세는 즉위 초 서쪽 원정에 집중하다가, 기원전 718년 마침내 숙적 우라르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르미아호 주변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하여 우라르투에 복속된 만나이인을 공격하고, 아시리아 쪽으로 돌아서도록 유도했다. 루사 1세는 만나이인을 다시 우라르투에 복속시켰지만, 이러한 줄다리기는 3년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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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14년, 사르곤 2세는 루사 1세가 북쪽 킴메르인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병을 결심했다. 그는 우르미아호 지역으로 진격하던 중, 루사 1세가 이끄는 우라르투군이 아시리아군의 배후를 노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르곤 2세는 기습적으로 우라르투군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울프 시를 파괴하고 반 호에 도달했다. 정찰 결과, 그는 루사 1세가 아시리아의 공격을 피해 재물을 투쉬파에서 무사시르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험준한 산중에 위치한 우라르투의 종교 중심지 무사시르는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르곤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험난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무사시르를 공격, 재물을 약탈하고 우라르투의 주신 할디 신전을 파괴했다.

사르곤 2세의 기록에 따르면, 무사시르 함락 소식에 충격을 받은 루사 1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치며 절규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무사시르 함락은 우라르투 쇠퇴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루사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아르기슈티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우라르투는 북방의 새로운 영토인 트란스코카서스 지방에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킴메르와 스키타이 같은 유목민족의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루사히닐리 - 터키의 토프라칼레에서 발굴된 우라르투 예술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루사히닐리 - 토프라칼레, 터키
청동 조각우라르투 우라르투 테이셰바의 조각
왼쪽: 루사히닐리 - 토프라칼레, 터키에서 발견된 우라르투 신의 조각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가운데: 루사히닐리 - 토프라칼레, 터키에서 획득한 우라르투 폭풍과 전쟁의 신 테이셰바의 조각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른쪽: 현대 반 시와 반 호수 동쪽에 위치한 루사히닐리 - 토프라칼레, 터키. 왕 루사 1세를 기리기 위해 루사히닐리라고 명명되었다.


3. 1.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의 전쟁



루사 1세는 아시리아의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기원전 745–727년)가 제국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 아시리아 군대와 싸우며 시간을 보냈다. 아시리아 자료에 따르면, 루사는 아시리아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혀 아시리아 군대가 전멸했으나, 이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기원전 734년에서 727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슈르-레'이''의 자료(SAA 19, 72)는 루사의 추가적인 군사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데, 우라르투 왕과 '에티니의 땅' 통치자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우라르투는 몇 차례 패배를 겪었다.

이러한 갈등으로 우라르투사르두리 2세 시대에 합병했던 영토를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잃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루사 1세는 우라르투 왕 사르두리 2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대패하여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4][5] 이 패배는 루사의 증조부 이슈푸이니가 할디 신을 우라르투의 주신으로 삼은 이후 처음이었고, "할디 신의 무기"가 "아슈르 신의 무기"에 패배한 것은 왕국의 민심을 혼란시켰다. 유프라테스강 서쪽 영토는 상실되었고, 속국들은 아시리아로 전향하거나 독립했다.

다행히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국내 내정에 바빠 우라르투 공격을 늦추었다.

3. 2. 에티니와의 전쟁

루사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시리아인들은 우라르투를 상대로 계속 군사 작전을 펼쳤다.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기원전 745–727년)는 강력한 적이었으며,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려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우라르투를 반복적으로 침공했고, 이로 인해 루사 1세는 즉위 초기에 아시리아 군대와 싸우며 시간을 보냈다.

아시리아 자료에 따르면, 루사는 아시리아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혀 아시리아 군대가 전멸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734년에서 727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떤 ''아슈르-레'이''의 자료(SAA 19, 72)에서는 루사의 추가적인 군사 활동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우라르투 왕과 '에티니의 땅'의 통치자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라르투는 몇 차례 패배를 겪었다.

에티니 산은 동부 쿠르디스탄에 위치해 있으며, '아루니와 에티니의 땅'은 살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언급되어 있다.[6]

이러한 갈등은 특히 우라르투의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잇따른 패배로 우라르투는 사르두리 2세 시대에 합병했던 영토를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잃었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4. 사르곤 2세의 침공과 우라르투-아시리아 전쟁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은 후 살마나세르 5세 치세 동안 우라르투는 불안정해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715년,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아시리아 전쟁을 선포하여 우라르투의 동맹국인 만네아 왕국을 공격하고 우라르투를 공격했다. 루사 1세는 이 전쟁에서 크게 패배했고, 우라르투는 다시 정복되어 아시리아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7]

루사히닐리에서 발굴된 우라르투 예술 샘플은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시되어 있다.

4. 1. 사르곤 2세의 즉위와 정세 악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은 후 살마나세르 5세 치세 동안 우라르투는 불안정해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722년에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대한 아시리아의 적대 행위를 계속했다.[7] 기원전 722년에 호전적인 사르곤 2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우라르투를 둘러싼 정세는 악화되었다. 사르곤 2세는 신도시 두르 샤루킨을 건설했지만, 그 유적에서 점토판 문서가 발견되어 아시리아가 수집한 우라르투에 관한 정보가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사르곤 2세는 즉위 초에는 서방으로의 원정에 종사했고, 기원전 718년에는 북방의 숙적 우라르투로 칼날을 향했다. 먼저 우르미아호 주변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하여 우라르투에 복속하는 만나이인을 공격하고, 아시리아 측으로의 배신을 도모했다. 루사 1세는 일단 아시리아에 복속했던 만나이인을 다시 우라르투에 복속시켰고, 이러한 상황이 3년 동안 지속되었다.

4. 2. 만네아 왕국을 둘러싼 분쟁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고 살마나세르 5세가 통치하던 시기 우라르투는 불안정해졌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722년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대한 적대 행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715년,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아시리아 전쟁을 일으켜 우라르투의 동맹국인 만네아 왕국을 공격했다. 만네아 왕국을 물리친 후 아시리아는 우라르투를 공격했고, 루사 1세는 이 전쟁에서 크게 패배했다. 그 결과 우라르투는 다시 정복되어 아시리아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7]

같은 시기에 루사 1세는 감미르에서 침입한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이러한 연이은 패배로 인해 루사 1세는 많은 장군들과 총독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구리아니아 산으로 도망쳤다.[7]

4. 3. 킴메르족의 침입과 루사 1세의 패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고 살마나세르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우라르투는 불안정해졌지만,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722년에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대한 아시리아의 적대 행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715년,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전쟁을 선포하여 우라르투-아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아시리아는 우라르투의 동맹국인 만네아 왕국을 물리친 후 우라르투를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루사 1세는 크게 패했고, 우라르투는 다시 정복되어 아시리아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루사 1세는 이 시기에 감미르에서 침입해 오는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이러한 연이은 패배로 인해, 루사 1세는 많은 장군들과 총독들이 모르는 사이에 구리아니아 산으로 도망쳤다.[7]

기원전 714년, 루사 1세는 아시리아와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살했다.

4. 4. 사르곤 2세의 우라르투 침공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은 후 살마나세르 5세 치세 동안 우라르투는 불안정해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722년에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대한 아시리아의 적대 행위를 계속했다. 기원전 715년,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에 전쟁을 선포하여 우라르투-아시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아시리아는 우라르투의 동맹국인 만네아 왕국을 물리친 후 우라르투를 공격했다. 루사 1세는 이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우라르투는 다시 정복되어 아시리아에 막대한 연공을 바쳐야 했다. 루사 1세는 또한 감미르에서 침입하는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이러한 손실의 결과로 루사 1세는 많은 장군들과 총독들이 알지 못하는 채로 구리아니아 산으로 도망쳤다.[7]

이러한 패배 이후 루사 1세의 아들 멜라르투아가 아버지 대신 왕위에 오르거나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루사 1세는 투쉬파로 돌아왔고, 멜라르투아는 이후 그의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관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8]

기원전 722년에 호전적인 사르곤 2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우라르투를 둘러싼 정세는 악화되었다. 사르곤 2세는 신도시 두르 샤루킨을 건설했지만, 그 유적에서 점토판 문서가 발견되어 아시리아가 수집한 우라르투에 관한 정보가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즉위 초에는 서방으로의 원정에 종사했던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18년에 칼날을 북방의 숙적 우라르투로 향했다. 먼저 우르미아호 주변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하여 우라르투에 복속하는 만나이인을 공격하고, 아시리아 측으로 배신을 도모했다. 루사 1세는 일단 아시리아에 복속했던 만나이인을 다시 우라르투에 복속시켰고, 이러한 상황이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원전 714년, 루사 1세는 아시리아와 킴메르인과의 패배로 자살했다. 무사시르 함락 소식에 충격을 받아 절망한 루사 1세는, 사르곤 2세의 전언에 따르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절규하며 스스로 칼을 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무사시르 함락은 우라르투의 쇠퇴를 결정적으로 만드는 사건이 되었다. 루사 1세의 뒤는 아들 아르기슈티 2세가 계승했고, 이후 우라르투는 북방의 신영토인 트란스코카서스 지방에서 활로를 찾게 되지만, 북방에는 킴메르와 스키타이와 같은 유목민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4. 4. 1. 무사시르 약탈

기원전 714년, 사르곤 2세는 루사 1세가 북방의 킴메르인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라르투 원정을 결심했다. 사르곤 2세는 우르미아호 지방으로 진격했지만, 루사 1세가 이끄는 우라르투군이 아시리아군의 배후를 치기 위해 진군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르곤 2세는 우라르투군의 야영지를 야습하여 격퇴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울프 시를 파괴하고 반 호에 도달했다. 정찰 결과 사르곤 2세는 수도 투슈파를 지나 아르기슈티히니리과 우아이아스를 공략했다. 두르 샤루킨에 개선한 사르곤 2세는 아시리아의 공격을 두려워한 루사 1세가 재물을 투슈파에서 무사시르로 옮겼다는 정보를 얻었다. 우라르투의 종교 중심지였던 무사시르는 험준한 산중에 있어서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르곤 2세는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숲으로 덮인 험준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무사시르를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우라르투의 주신 할디의 신전을 모욕하고 파괴했다.

5. 루사 1세의 죽음

기원전 714년, 루사 1세는 아시리아와 킴메르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살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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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22년, 사르곤 2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우라르투를 둘러싼 정세는 악화되었다. 사르곤 2세는 두르 샤루킨을 건설했는데, 그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를 통해 아시리아가 우라르투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사르곤 2세는 즉위 초 서방 원정에 종사하다가 기원전 718년, 북방의 숙적 우라르투로 칼날을 향했다. 먼저 우르미아호 주변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하여 우라르투에 복속된 만나이인을 공격하고, 아시리아 측으로 배신을 도모했다. 루사 1세는 아시리아에 복속되었던 만나이인을 다시 우라르투에 복속시켰고, 이러한 상황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원전 714년, 사르곤 2세는 루사 1세가 북방의 킴메르인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진을 결심했다. 사르곤 2세는 우르미아호 지방으로 진격했지만, 그곳에서 루사 1세가 이끄는 우라르투군이 아시리아군의 배후를 치기 위해 진군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르곤 2세는 뒤를 찔러 우라르투군의 야영지를 야습하여 격퇴했다. 사르곤 2세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울프 시를 파괴하고 반 호에 도달했다. 정찰 결과 사르곤 2세는 수도 투슈파를 지나 아르기슈티히니리와 우아이아스를 공략했다. 두르 샤루킨에 개선한 사르곤 2세는 아시리아의 공격을 두려워한 루사 1세가 재물을 투슈파에서 무사시르로 옮겼다는 정보를 얻었다. 우라르투의 종교 중심지였던 무사시르는 험준한 산중에 있어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르곤 2세는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숲으로 덮인 험준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무사시르를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우라르투의 주신 할디의 신전을 모욕하고 파괴했다.

무사시르 함락 소식에 충격을 받은 루사 1세는 절망하여, 사르곤 2세의 전언에 따르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절규하며 스스로 칼을 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무사시르 함락은 우라르투의 쇠퇴를 결정짓는 사건이 되었다. 루사 1세의 뒤는 아들 아르기슈티 2세가 계승했고, 이후 우라르투는 북방의 신영토인 트란스코카서스 지방에서 활로를 찾게 되지만, 북방에는 킴메르와 스키타이와 같은 유목민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6. 유적과 유물

사르두리 2세의 아들 루사 1세는 아버지의 대패로 인해 위기에 처한 왕국을 물려받았다. 유프라테스강 서쪽 영토는 상실되었고, 속국들은 아시리아로 전향하거나 독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사 1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영내를 순행하며 왕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무사시르를 중심으로 한 할디 신 숭배를 중시하여 이를 권위 부여에 이용했다.

다행히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살만에세르 5세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면서 루사 1세는 트란스코카서스를 정복하고 아시리아와의 국경 지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투슈파() 근처에 신도시 루사히니리를 건설하고, 북변의 세반 호수 주변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다.

6. 1. 루사히닐리 (토프라칼레)

사르두리 2세의 아들 루사 1세는 아버지의 대패로 인해 위기에 처한 왕국을 물려받았다. 유프라테스강 서쪽 영토는 상실되었고, 속국들은 아시리아로 전향하거나 독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사 1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영내를 순행하며 왕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무사시르를 중심으로 한 할디 신 숭배를 중시하여 이를 권위 부여에 이용했다.

다행히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살만에세르 5세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면서 루사 1세는 트란스코카서스를 정복하고 아시리아와의 국경 지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투슈파() 근처에 신도시 루사히니리를 건설하고, 북변의 세반 호수 주변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다.

6. 1. 1. 터키 반 인근 케시슈굘 비문

1891년에 터키 근처에서 발견된 케시슈 굘 비문에는 루사 1세가 투슈파와 루사히니리의 식수 및 주변 관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지하에 수도관을 부설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The Ancient Languages of Asia Minor. https://smerdaleos.f[...]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2] 논문 Could Rusa son of Erimena have been king of Urartu during Sargon's Eighth Campaign? https://www.academia[...] 2012
[3] 간행물 The Kingdom of Van (Urartu) http://www.attalus.o[...] Cambridge 1925
[4] 간행물 Could Rusa son of Erimena have been king of Urartu during Sargon's eight campaign? 2012
[5] 학술지 Sarduri II – One of the most unfortunate rulers of the 8th century B.C.E https://www.academia[...] Jagiellonian University 2014
[6] 웹사이트 The Monolith Inscription of Shalmaneser III. https://www.mesopota[...]
[7] 서적 Who Were the Cimmerian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https://www.royalaca[...] The Royal Danish Academy of Sciences and Letters 1988
[8] 서적 Who Were the Cimmerian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https://www.royalaca[...] The Royal Danish Academy of Sciences and Letters 1988
[9] 문서 『アジア歴史事典』第1巻 平凡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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